예순의 봄, 다시 설레다
박영래 노원문화원 사무국장
"여행은 다리가 떨릴 때가 아니라, 가슴이 떨릴 때 떠나라." 이번 제주 길이 그랬다.
환갑을 맞은 스물아홉명의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접혀 있던 시간이 조용히 펼쳐졌다. 각자의 삶 속에 묻혀 있던 얼굴들이 제주 바람 속에서 서서히 제빛을 되찾았다. 계단을 오르면 숨이 먼저 차고, 오래 걸으면 다리가 무거워졌다. 그런데도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오래전, 이유 없이 웃던 시절의 공기가 다시 스며들었다.
중학교 그 시절, 10리를 걸어서 등교하다 보니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2교시 종이 울리면 선생님의 눈을 피해 도시락을 꺼냈다. 뚜껑을 열지 않고 그대로 뒤집어, 눌린 밥 밑바닥부터 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인기척이 나면 재빨리 다시 엎어놓고, 아무 일 없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삼켰다. 그 작고 은밀한 공모가 우리를 배부르게 했다. 점심이 부족해도 괜찮았다. 함께 웃던 그 순간이 더 깊이 마음을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가난했지만 궁하지 않았고, 배고팠지만 마음은 늘 넉넉했다.
세월은 그 위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머리는 희어지고, 얼굴에는 각자의 시간이 잔잔히 새겨졌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잠시 놓아둔 채 살아왔다. 그러다 다시 만났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친구였기 때문이다.
제주의 길은 조용했다. 바다는 깊었고, 바람은 느렸다. 우리는 한라수목원의 숲길을 나란히 걸었다. 말은 줄어들고, 대신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 침묵이 오히려 편안했다. 오름 위에 서니 작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이유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은 낯설지 않았다. 문득, 도시락을 뒤집던 그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밤이 되면 술잔이 돌았다. 이야기가 풀리고, 웃음이 이어졌다. 그 웃음 속에는 세월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교실 뒤편에서 몰래 도시락을 먹던 아이들이었다.
가파도의 청보리는 바람이 불면 몸을 낮추었다가 다시 일어섰다. 억지로 버티지 않고, 자연스럽게 흔들리며 제 자리를 지켰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단단히 서 있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조금은 굽혀도 되었을 것을, 조금은 흘려보내도 되었을 것을. 자연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행의 끝자락, 우리를 가장 설레게 했던 것은 뜻밖에도 작은 놀이 하나였다. 마니또.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채, 우리는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마음을 건넸다. 짧은 말 한마디에도 온기를 담고, 사소한 배려 하나에도 의미를 얹었다. 그 마음은 오래전, 말하지 못하고 품어두던 감정과 닮아 있었다. 마지막 날, 버스 안에서 이름이 불려졌다. 순간,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 얼굴들은 예순이 아니라, 분명 소년과 소녀였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진 이름들. 버스 안은 한순간에 웃음으로 가득 찼다. 놀람과 반가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쑥스러움이 뒤섞인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었다.
이번 여행은 우리를 다시 그 교실로 데려다 놓았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서로를 믿고 웃던 시간으로. 그리고 다시, 지금의 자리로 조용히 돌려보냈다. 친구란 그런 존재였다. 멀어져도 사라지지 않고,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시간을 다시 어루만지고 돌아왔다. 언젠가 다시 길을 나설 것이다. 그때도 우리는, 아마 웃고 있을 것이다. 마치 2교시 종이 울리기를 기다리던 아이들처럼.
노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