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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동 큰 어른’ 홍원식 초대 노원구의원

구의원 출마 포기 후 줄곧 동네 모임 후원자 역할

기사입력 2026-03-1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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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동 큰 어른홍원식 초대 노원구의원

구의원 출마 포기 후 줄곧 동네 모임 후원자 역할

후배들이 더 잘하면 기분 좋아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었고, 상계동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었으니 그만하면 됐다.”

어느 마을이나 큰 부자가 있어 마을 일에 이래저래 참견한다. 이들을 동네 유지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전통 마을을 아파트 단지로 바꿔버린 노원에서는 특히 드물다. 노원마을에 사는 홍원식 노원구의회 초대의원은 팔순을 넘겨 최근 크고 작은 감투를 내려놓았지만 마을의 어른으로 늘 존경받는다.

5살 때 월남한 홍원식 전 의원은 돈암동에 살다가 분가해 1968년 노원마을에 자리 잡았다.

인쇄소에서 일하다 독립해 제본소를 차렸지만 19731차 유류파동으로 큰 빚을 지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금장 기술(책의 페이지 가장자리나 표지 장식에 금을 입혀서 장식하고 보호하는 전통 제본 기술 edge gilding)을 가지고 있어 부활할 수 있었다.

당시 성경이 1200원이었는데, 일본에서 금장을 하고 오면 15000원이 되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우리나라에서는 기술이 없는가 하고 나를 찾아왔다. 공장 지을 자본까지 빌려줘서 도봉금장이 시작됐다.”

당시 유일한 금장 공장인데다가 기술도 뛰어나 세계로 나가는 성경을 다 한국에서 찍어 수출했다. 직원이 70명이 넘었다.

이제는 핸드폰 생기면서 책을 읽는 문화가 축소됐고 성경도 옛날만큼 안 본다. 도봉금장은 파주 출판단지로 옮겨 아들이 운영하고, 공장 자리에 건물을 지어 살고 있다.

홍원식 전 의원은 공장을 운영하면서도 노원에서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새마을협의회, 축구연합회에서 활동하다가 1988년 노원구가 분구하면서 초대회장을 두루 맡았다. 그러고 지방자치 의회가 생기면서 1991년 초대 노원구의회 의원이 되었다.

배운 것도 변변치 않아 생각이 없었는데, 추천이 많았다. 이왕에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고 했지만 싸움을 할 줄 몰라 자꾸 당했다. 상임위에서 안건을 심의해서 올리면 본회의에서 엉뚱한 소리를 해서 뒤집었다. 항의하면 자기 동네 눈치를 봐야 하니 이해해달라고 변명했다. 하반기에 의장하기로 약속하고 양보했는데 그 약속도 뒤집혔다. 당시 한달에 80만원을 활동비로 주는데, 애경사가 너무 많아 돈을 꽤 썼다. 생기는 것 없는 일은 그만두자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초대의원 중 유일한 자진 출마포기 선언이었다. 그러면서도 반대당이지만 같은 동네에서 활동했던 곽종상 의원을 늘 칭찬하고 도와주면서 어른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또한 구의원을 내려놓고도 마을의 작은 단체에서도 회장으로, 고문으로 원로 후원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동 방위협의회장, 주민자치회장까지 소득 없는 벼슬을 다 했다.

그러다 7년 전 신장암으로 제거 수술을 했는데, 반대편에도 암이 생겨 투석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걸음도 조금 불편하고, 건망증도 생겨 종종 이름을 까먹기도 한다.

이제는 언어구사가 잘 안되니 소통이 불편하다. 도와주겠다고 나서다가 오히려 불편을 끼칠 수 있다.”그래서 역대 의원들 모임인 의정회에도 30년 동안 유지한 회장직을 내려놓았다.

동네 사람들을 다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홍원식 전 의원은 후배들이 나보다 더 잘해야 기분이 좋다. 좋은 후배들이 더 힘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부정선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고 묻고이러면 선거 하나마나야!”라고 답했다.

백광현 기자 100-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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