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불암산 석재는 어디 갔을까?
경회루, 원릉, 영녕전, 성곽 등 조성
수락산과 불암산은 조선시대 궁궐·왕릉·종묘·성곽 건축에 쓰인 석재를 공급한 채석(採石)지였다. 이 두 산의 석재는 어디에 쓰였을까?
국립문화재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 『국역 조선시대 궁·능에 사용된 석재 산지』(23년 12월)에 따르면 두 산의 석재는 경복궁, 경회루 기둥, 덕수궁 중화전, 종묘 영녕전, 현종과 그 비 명성황후의 숭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 명성왕후(고종 비) 홍릉, 숭례문 남변 성곽 등에 사용됐다.
석재 산지는 한양도성 내부, 서교(西郊), 동교(東郊) 등 3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사대문 안에서는 채석이 금지됐지만 경복궁 중건 당시 삼청동에서 채석한 사례와 이에 왕에게 반대 민원을 보고한 기록이 나온다. 서교는 은평구 홍제동, 홍은동, 응암동, 녹번동 일대로 북한산 자락이다. 동교는 노원구 중계동, 상계동, 강북구 우이동, 수유동으로 불암산, 북한산 자락이다. 동교는 18세기 후반부터 빈번하게 부석처(채석처)로 등장한다. 노원에는 수락산 귀임봉 아래 1곳, 불암산에 4곳의 부석처를 추정했다.
석재를 채석하고 가공한 부석소(浮石所)로 ‘노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현종이 효종의 영릉을 조성할 때인 1659년이다. 이어 1674년 숙종이 현종의 숭릉 조성 시에도 ‘노원’ 석재를 썼고, 경종과 선의왕후의 의릉에는 노원 중계(불암산)와 노원 상계(수락산) 석재만, 영조와 정순왕후 의릉에는 노원 중계와 불암산 석재만 썼다. 왕릉에는 1903년 효정왕후(헌종 계비) 경릉 조성 시 불암과 우이동 석재를 쓴 기록이 마지막이다. 목릉, 휘릉, 혜릉, 태릉, 강릉, 장릉, 선릉, 정릉 등의 비석, 주초석, 농대석, 석물 등도 노원의 석재다. 동구릉의 현릉, 휘릉, 숭릉, 혜릉, 수릉, 경릉 등 6개 능에 노원의 석재를 쓴 것이다.
노원에서 많이 채석한 탓인지 헌종 이후 능 조성할 때 우이동 인근의 ‘조계’ 등은 큰 석재를 생산하는 대부석소로, 노원은 소부석소로 삼았다. 1846년(현종12) 문조의 수릉 조성 시 “노원에 남아있는 돌의 품질이 대석물로 쓰기에 감당하기 어려워 부득불 조계에서 떠내고, 소부석은 사례를 따라 노원에서 떠내며”라는 기록이 나온다.
궁궐 중건과 보수에도 노원의 석재가 사용됐다. 1749년(영조25) 창덕궁 내 대보단, 1804년(순조4) 인정전, 1865년(고종2) 경복궁 중건 때 노원, 납대울, 상계, 중계, 불암(불암산 동편) 등 14곳의 석재를 이용했다. 경회루 48개 석주는 삼청동, 영풍정(창신동), 불암에서 채석했다. 1904년(광무8) 덕수궁 중화전 중건에도 우이동과 불암의 석재를 사용했다.
성곽 조성 시에도 노원의 석재가 많이 사용됐다. 1704년(숙종30)을 시작으로 1780년(정조4)부터 1857년(철종8년)까지 숙정문 동변, 소의문 북변, 혜화문 남변, 흥인문 남변, 숭례문 남변·동변, 구의봉 동변·서변 등에 성곽을 쌓을 때 서교 녹번현만 제외하고 총 20회 연속 노원의 석재만 썼다.
노원에서의 채석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노원구 토박이인 김동익 초대 노원구의회 의장은 “종암동 사람이 운영하던 수락산은 채석장이 작고, 이태범씨가 하다가 김동일씨가 운영한 불암산 채석장은 컸다. 지금 둘레길 위쪽인데 중계동 산101번지, 나비공원 뒤, 배드민턴장, 납대울(중계본동) 총 네 군데가 있었다. 학도암 입구 양쪽 큰 바위는 덕수궁 철망을 헐고 돌담 공사할 때 나갔다. 나비공원 오가는 도로가 채석장 트럭이 다니던 길이다. 나비정원 옆 창변계곡 인근에 치마바위, 널바위, 쪽바위 등 크고 좋은 바위가 있었는데 다 깨버려 창살바위와 사랑바위만 남아있다. 9, 8자짜리 장석을 장대라고 하는데 그걸 뜯어냈고, 밑면이 1자×1자인 계단용 돌도 통돌로 잘라냈다. 인부들이 어깨에 메고 나르는 견지돌은 옹벽 석축 공사에 썼다. 아스팔트용 잡석도 많이 나와서 70년대 초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돌을 깨서 한 양동이에 몇 십원씩 받았다. 당시엔 농사짓거나 채석장에서 일하는 게 동네주민들의 유일한 돈벌이였다.”고 회고했다.
노원신문 김명화 기자 mhyb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