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6-06-24 12:36

  • 연재물 > 어르신

윤영록 시니어의 동네일기 「지공거사」의 첫 발품(250820)

기사입력 2025-08-29 17:24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0

윤영록 시니어의 동네일기

지공거사의 첫 발품(250820)

웬만해서는 운전실 밖을 나올 일이 없는 지하철 승무원이 어쩐 일로 대낮에 창신동 시장통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승무 중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삶의 모습들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리어카와 자전거가 사람들을 가르고 장사꾼들의 목청이 드높습니다. 가게마다 진열된 물건들도 처음 본 것처럼 신기합니다.

우리가 컴컴한 땅속을 달리고 있을 때 땅 위에서는 이렇게 신기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구나! 시간이 나면 지하철역 주변의 삶을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한 것과 달리 가벼운 일이 아니고 뭐가 그리 바빴는지 정년퇴직 때까지 그런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마침내 나도 지공거사(地空居士)대열에 합류하는 날.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상계역 게이트 앞. 5만원을 충전해서 정년퇴직 때 받은 명예사원 (교통)카드와 한 달 전에 받은 서울특별시 어르신 교통카드를 나란히 놔 보았습니다. 세월의 격차만큼 여러 생각이 교차합니다. 어르신 교통카드를 갖다 대자 잔액 “0”이 뜨면서 신통하게도 게이트의 날개가 활짝 열렸습니다. 진접역까지 곧장 갔다가 돌아오면서 한 정거장씩 들러 보기로 했습니다.

진접역을 나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요양원과 동물병원 그리고 휘날리는 부동산 깃발입니다. 빵집과 분식집은 일찌감치 영업을 준비합니다. 한적한 어린이 공원 옆 얕은 물에 손을 씻고 산책길을 더 걸었습니다. 오남리는 전에 자전거로 임도를 타 본 적이 있어서 낯설지 않은 곳입니다. 언제 또 자전거로 오남리를 올 수 있을까? 별내 별가람역은 불암산 너머로 노원에 맞닿아서 서울과 다르지 않습니다. 별내에서 보니 불암산은 정확하게 뫼산()입니다. 더운 날씨에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서 불암산역을 지나 상계역에서 하차! 발이 풀리니 4정거장을 갔다 온 것만으로도 상쾌합니다.

지공거사가 된 것은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역 주변의 삶에 무임승차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런데 노선도를 보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촘촘한 지하철과 수도권 전철의 방대함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희생의 결과일까요? 그 덕분에 시민의 발이었던 내가 그때는 갈 수 없었던 이들의 삶에 드디어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쉬엄쉬엄 가렵니다. 이제는 한 눈도 팔고 해찰도 해가면서 내가 가야 할 길과 내가 가고 싶은 길은 혼자라도 좋습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에게 오늘 여행을 이야기합니다.

노원신문
 

 

92 (100-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