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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의 보물 이문건 ‘3가지 최초’

하영권 고문자연구소 사무국장(노원뉴스 나우온 기자)

기사입력 2024-10-0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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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의 보물 이문건 ‘3가지 최초

최초의 한글고비 이윤탁 한글영비

최초의 육아일기 양아록’,

최초의 한글표기소설 설공찬이

하영권 고문자연구소 사무국장(노원뉴스 나우온 기자)
 

578번째 한글날, 가족이 찾아가 볼 만한 보물이 노원에 있다. 하계1동에 있는 이윤탁 한글영비위치는 한글비석로 202이다.

상계8동 노원성당에서 마들역-상계역-중계동은행사거리를 거쳐 하계역을 지나 월계1교에서 월계로를 이어지는 폭 20~30m, 길이 5530m의 도로가 한글영비를 지나가서 한글비석로로 이름이 붙었다.

최초의 한글 고비(古碑)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영비를 만든 중종 때의 문신인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3가지 측면에서 한글 최초의 역사유적 기록을 만들었다.

한글영비는 한글 총 30자가 적혀 있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이다. 이문건이 태릉에 있던 아버지 이윤탁(李允濯, 1462~1501)의 묘를 이전하여 어머니 고령 신씨의 묘와 합장하면서 직접 글을 쓰고 글씨를 새겨 1536년 묘 앞에 세운 비다.


 

신령한 비석이라 훼손한 사람은 화를 입으리라는 뜻을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당부한 글이다.

이 비석은 중계동 택지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경계문에도 불구하고 6년 만에 묘와 함께 199815m 옮겨졌다.

1968년 발견되고, 197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7호 한글고비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그 의미가 재해석되면서 대한민국 보물 제1524호로 지정되었고 명칭도 이윤탁 한글 영비로 변경되었다. 2012년 도로명 주소가 도입하면서 묘 옆을 지나가는 6차선 도로에는 한글비석로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이 비를 세운 1536년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90년이 지난 때이다. 아직 한글이 널리 사용되지 못했던 시기에 과감히 한글묘비를 세운 것이 주목된다.

한글영비는 언해문이 아닌 순우리말 문장으로 쓰였다. 15세기 이후 한문 원문을 번역한 언해문이 주로 남아 있는데, 짧은 문장이긴 하나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장을 남긴 것은 한글영비가 처음이다. 한글로만 쓴 문헌은 18세기에나 등장한다. 16세기에 이미 순국문으로만 쓰인 문장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보물이 된 첫 번째 이유이다.

 

30자의 한글이 지닌 가치와 더불어 주목할 것으로 두 가지가 더 있다.

이 묘의 주인공인 이윤탁은 중종 때 승문원 관리였다. 이 묘비의 글을 새긴 사람은 셋째 아들 이문건이다. 이문건은 양아록이란 육아일기를 남겼다. 이문건이 손자 이수봉이 태어난 1551년부터 1566년까지 양육하면서 적은 일기이다. 이 양아록은 학계에 보고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육아일기로 평가된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3호로, 성북구에 거주 중인 후손들이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조선 중기 양반 집안에서의 아동교육과 생활풍속 등을 잘 이해할 수 있다.
 

“KBS 역사추적 – 조선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

육아일기라는 훈훈한 겉모습과 달리, 내용은 좀 안타까운 사연이다.

이문건은 손자가 커가면서 애정을 주면서도 기대가 컸던 나머지 지나치게 엄격했다. 그 결과 손자인 수봉은 이런 할아버지의 훈육을 따라가지 못하고 견딜 수가 없어 공부를 점차 멀리하고 술을 가까이하며 비뚤어졌다.

이문건이 손자에게 집착한 것은 아들 이온 때문이다. 아들 이온은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학습이 부진했고, 아들에게 실망해서 학대까지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부자관계가 악화되었고, 그래서 더 손자에게 기대를 걸고 집착하게 된 것이다.

결국 양아록의 끝에 이문건은 자신의 훈육에 대한 반성과 함께 '할애비와 손자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고 적었다.

이문건은 손자가 입신양명해 쇠락한 가문을 다시 부흥시키길 간절히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손자가 출세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수봉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크게 활약했고, 의롭고 윤리적인 선비로 살았다.

이문건의 양아록은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했고, 만화로도 재탄생(2008조선남자, 아이를 키우다)하기도 했다. 방송에서도 2020년 'KBS 역사추적 조선 선비의 육아일기, 양아록'이 다뤄졌다.

 

더불어 주목해야 할 세 번째 가치는 설공찬전이라는 괴담형 소설책 관련이다.

이문건의 묵재일기 이면 한글소설 ‘설공찬이’

이문건과 거의 동시대의 인물인 채수가 설공찬전이라는 소설을 지었다. 그 내용은 '설공찬이 죽어 저승에 갔다가 그 혼이 돌아와 남의 몸을 빌려 수개월간 이승에 머물면서 들려준 자신의 원한과 저승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설공찬전은 당시 금서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설공찬전은 사람들에게 해로운 책이라며, 그 책을 지은 채수에게 벌을 주고 책은 모두 불태워야 된다는 회의 기록이 나온다.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저승 이야기, 윤회 이야기 등이 문제가 된 것이다. 특히 중종의 정통성을 직접 공격하는 표현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목만 전해 내려오다가 극적으로 소설의 원문이 발견되었다. 1996년 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가 이문건이 쓴 묵재일기 원본을 보다가 그 책의 이면에서 이 설공찬전의 국문본이 기록되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귀하여 이면지를 재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국문본의 제목은 설공찬이. 발견된 국문본은 후반부가 없어진 채 13쪽까지만 남아있다. 설공찬이는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홍길동전보다 100년 앞서 한글로 적혀 있는 소설이다. 번역본이지만. 이 발견으로 설공찬전이 금서임에도 불구하고 한문 필사본뿐만 아니라 한글로도 필사되어 널리 읽힌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공침의 입에서 공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승에서는 여성에게 글공부도 시키지 않고, 벼슬도 주지 않지만 저승은 달라. 글을 읽고 쓰는 실력이 있다면 여성도 벼슬을 하며 잘 지내.”

최근 작가 김재석은 한글 필사본 부분은 원본에 충실하게 하면서도, 발견되지 않은 부분은 자료 조사를 통해 풍부하게 재구성한 이야기를 2021설공찬이라는 중편소설로 부활시켰다. 남아있는 3400여 자의 짧은 원전이 77000여자의 입체적 소설로 다시 쓰인 것이다.

설공찬전의 배경이 된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에는 '설공찬전 테마관'이 조성되어 있다.

이윤탁 한글영비 주변에서 우리는 한글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작은 영비 하나에 많은 역사적 사연들이 숨어 있다.

노원구가 한발 더 나서 주어야 한다. 한글영비 주변 어디에도 3가지가 최초인 사실을 알 수 있는 설명이 없다. 노원의 보물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도록 설명 추가를 시작으로, 한글영비 테마관까지 조성되어도 좋을 것 같다.

[사진1] 이윤탁 한글영비 전경

[사진2] 한글영비에 새겨진 고한글 30

노원신문

 

55 (100-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