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암(牛岩) 작은 도서관
홍만희 수필가
늦도록 기승을 부리던 더위는 세찬 비바람에 쫓겨 가고 이제는 쾌청하고 삽상한 가을 날씨다.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다. 누군가는 가을을 와인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독서의 계절임에 틀림이 없다. 활력이 넘치는 봄, 여름, 몸을 움츠리게 하는 겨울 대신 가을은 차분해지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에 좋다는 이야기다.
도서관 개관 준비를 위해서 정리하다가 서가에 꽂힌 책들을 훑어본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서가의 중앙 하단에는 시집이 무게중심을 잡고 있다.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거의 모든 지식과 정보의 검색이 가능한 지금은 별로 쓸모가 없겠지만, 예전에는 책이 유일한 지식창고였다.
그동안 내가 산 책들을 버리지 못했다. 아끼고 아껴 구입한 것들이기 때문이거니와 나의 문학에 살과 피를 나눈 분신과 같기 때문이다. 언젠가 큰맘 먹고 몇십년 쌓인 문예지들은 버리려고 따로 내놓다가 무심코 그중 한 권을 펼쳐보는데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오랜 세월에 누렇게 변색 된 책장의 군데군데 그어진 밑줄을 보노라니 마치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보는 것 같은 감회가 밀려온 것이다.
문학 서적을 읽는 것이 좋아 종로에 나가면 서점에 들르곤 했다. 간 김에 두어 시간 서점 곳곳을 둘러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찮아 살 수 없는 책은 선 채로 훑어보았다. ‘월간문학’과 ‘문예사상’ ‘현대문학’ ‘문학동네’ 같은 문예지는 거르지 않고 구입했지만, 시 전문지와 불교평론 등 월간서적은 헌책방에서 주로 샀다. 결국, 나는 그 문예지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거실 곳곳에 쌓아 두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내 인생 여정의 길라잡이였다. 시와 수필을 쓰게 된 것도 그 책들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고 도달한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빈손을 내보일 수밖에 없다. 흔히들 책을 많이 읽으면 지식으로 가득 채워져서 모르는 것이 없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어느 철학자는 자신이 무얼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고 했듯이 독서는 할수록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닫게 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모아둔 도서가 쓸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책을 통해서 삶을 배웠고 그 삶을 글로 쓰다 보니 모아둔 책들이 누군가에게 보탬이 될 거라는 생각에 도서관을 설치하게 되었다. 동서고금의 모든 지식과 사상의 체계를 한군데 모으는 일이 나의 목표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주마간산으로 일별하는 것만도 사뭇 보람된 일이다.
선친 대대로 거처한 우맥각(하계동 을지병원 옆에 있는 집 택호)에 아버지 호를 딴 ‘우암도서관’을 건립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여기저기 보관된 책, 기증받은 책들을 한곳으로 모아 정리하고 있다.
책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책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섣불리 편견이나 독단에 치우치지 않고, 세상이 기울어졌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균형감각을 갖게 된 것이랄까.
이 작은 도서관 서가의 책들이 누군가에게 삶의 길동무가 되어 줬으면 좋겠다.
노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