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선생님 김재창의 팔도유람 산 이야기
경기도 여주 여행
세종과 효종, 명성황후, 임금님 쌀
여주시(驪州市)는 시의 중심에 남한강이 흐르고, 벼농사와 고구마, 참외 등 농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쌀은 ‘임금님께서 드셨던 귀한 쌀’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여주 쌀은 지리적 표시제로 등록되었다. 토지 대부분이 농지에다 상수원 보호구역이기 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
이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여흥 민씨(驪興 閔氏)들이 비교적 많이 거주한다. 여흥은 여주의 옛 이름이다. 민씨의 본관은 여주가 유일하다. 여흥 민씨는 조선 시대(대한제국 포함) 왕비를 4명이나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이번 여정은 영녕릉, 신륵사, 명성황후 생가이다. 영녕릉(英陵, 寧陵)은 세종과 효종의 왕릉이다. 두 능침(陵寢)이 가까이 있다. 신륵사는 보물이 8개가 있는 문화재의 보고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태어나 8세까지 살던 집이다.
서울 근교라 여유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승용차로 약 1시간 30분을 달려 영녕릉에 도착하였다. 주변 정리가 잘되어 있고 사방이 확 트여 가슴을 시원하게 하였다. 먼저 세종과 부인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英陵)부터 찾았다. 입구에는 붉은 소나무들이 정겹게 서 있다.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 등이 지내던 곳인 재실(齋室)을 지나 좀 더 가니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 홍살문이 보였다. 넓은 마당에는 잔디가 파랗게 깔려 보기가 좋았다. 홍살문에서 정자각(丁字閣)까지 이어진 어로(御路)를 통해 들어갔다. 어로는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임금이 된 기분으로 걸었다.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라 봉분은 하나만 있었다.
세종과 효종의 능을 연결하는 길인 ‘왕의 숲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왕의 발자취를 느껴봤다. 오솔길 흙길이라 정감이 있고 숲이 아늑하며 한산해 좋았다. 약 15분을 걸으니 효종의 능이 보였는데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들어 특이하였다. 효종은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했는데, 그 원한을 풀기 위해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하였다.
다음 행선지인 천년고찰 신륵사(神勒寺)는 산속에 위치한 대부분의 절들과는 달리 평지인 강변에 있다. 남한강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먼저 강변에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정자에 가서 풍경을 감상하며 휴식하였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땀을 식혔다. 정자 아래에는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건너편 나루터에는 황포돛배가 보였다. 바위 위에는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보물)이 굽어보고 있었다. 극락보전 앞마당에는 보물인 다층석탑이 있는데, 흰 대리석을 재료로 하여 이색적이었다.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조사당에는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았다. 조사당 뒤편 계단을 오르니 부도탑, 묘비, 석등 3개의 보물이 같이 있어 깜짝 놀랐다. 나옹스님이 심었다는 수령 660년 된 은행나무, 나옹선사의 제자였던 무학대사가 심은 수령 600년 된 향나무는 신륵사를 더욱 운치 있게 만들었다.
신륵사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명성황후 생가로 향했다. 생가가 넓은 마당 한쪽에 아담한 규모로 있었다. 주변 조경을 잘해 놓아서 마음을 넉넉하게 하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명성황후가 태어난 방은 작고 소박하였다. 생가 옆에는 소원바위가 있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가 자식이 없어 근심하다 바위 아래서 기도를 드려 얻은 딸이 명성황후이다. 또 다른 한옥이 있는데, 감고당(感古堂)이다. 원래는 인현왕후가 자신의 친정을 위해 서울 안국동에 세운 건물인데, 덕성여고가 설립되면서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여주시가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명성황후 기념관에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전시되어 있어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산이야기 김재창 ☎010-2070-8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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